삶의 가치, 길이 아닌 깊이에 있다
지혜서의 통찰, 오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오래전 기록된 지혜의 말이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영예를 누리는 것이 아니며 인생은 산 햇수로 재는 것이 아니다." (지혜서 4장 8절) 평균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100세 시대'가 현실로 다가온 지금, 이 구절은 우리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흔히 오래 사는 것을 복(福)이자 성공의 척도처럼 여기곤 한다. 건강 관리와 안티에이징 산업은 날로 번창하고, 어떻게든 더 오래, 더 젊게 살기 위한 노력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그러나 지혜서는 단순히 생명의 연장이 곧 영예로운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오히려 살아온 햇수라는 양적인 척도로는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잴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삶의 가치를 측정해야 하는가? 이 오래된 지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재설정할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장수(長壽) 신화에 가려진 삶의 본질: 오래 살면 영예롭다는 착각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장수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의학 기술의 발달과 생활 수준의 향상은 인류의 평균 수명을 극적으로 늘려놓았다. '100세 시대'라는 구호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오래 사는 것 자체를 삶의 중요한 목표이자 성공의 증표로 여기게 되었다. 건강 보조 식품, 기능성 화장품, 각종 운동 프로그램 등 장수와 노화 방지에 관련된 산업은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며 우리의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미디어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조명하며 장수에 대한 사회적 동경을 부추긴다.
물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축복받을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장수 지향적 가치관이 삶의 다른 중요한 측면들을 가릴 수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때, 우리는 삶의 질, 의미, 그리고 관계의 깊이와 같은 본질적인 가치들을 소홀히 할 위험에 처한다.
지혜서의 경고처럼, 오래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삶을 영예롭게 만들지는 않는다. 긴 세월 동안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냈거나, 혹은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며 살았다면 그 삶을 결코 영예롭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장수 신화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양(quantity)에 집착하게 만들어, 정작 중요한 삶의 질(quality)을 놓치게 만드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짧지만 굵었던 삶들이 던지는 질문: 햇수보다 중요한 삶의 밀도
역사를 돌아보면, 짧은 생을 살았지만 인류에게 깊은 영감과 영향을 남긴 인물들이 많다. 모차르트는 35년, 빈센트 반 고흐는 37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39년의 삶을 살았다. 그들의 생애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짧았지만, 그들이 남긴 예술적, 사상적, 사회적 유산은 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이들의 삶은 살아온 햇수, 즉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이루고 어떤 가치를 추구했는지, 즉 삶의 밀도와 깊이가 중요하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지혜서의 구절은 바로 이러한 점을 지적한다. 인생의 가치는 단순히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 동안 얼마나 의미 있고 충실하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불꽃처럼 짧게 타올랐지만 세상을 밝힌 삶이 있는가 하면, 길고 긴 세월을 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거나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삶도 존재한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저 오래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삶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시간의 절대적인 길이보다는 그 시간을 채우는 내용의 풍부함과 의미의 깊이가 한 사람의 삶을 진정으로 가치있게 만든다. 짧지만 강렬했던 삶들은 우리에게 삶의 가치를 재는 기준이 '햇수'가 아님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세월이 아닌 지혜로 얻는 '백발': 참된 영예는 성찰과 이해에서 온다
지혜서 4장 9절은 8절에 이어 "오히려 백발은 사람의 슬기를 두고 하는 말이며, 흠 없는 생애가 바로 원숙한 노년기다"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오래 살아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얻은 지혜와 통찰, 그리고 흠 없는 삶의 자세가 진정한 의미의 '원숙함'이자 '영예'임을 강조한다. 즉, 육체적인 나이 듦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숙과 지혜의 깊이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지혜는 단순히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험을 통해 배우고, 실수를 통해 성찰하며,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깊은 통찰력이다. 이러한 지혜는 반드시 오랜 세월을 살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나이에도 깊은 성찰과 깨달음을 통해 지혜로운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며, 반대로 오랜 세월을 살았음에도 편협하고 어리석은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진정한 영예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끊임없는 성찰, 그리고 올바른 가치관을 추구하는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나이 듦이 가져다주는 경험은 지혜의 중요한 자양분이 될 수 있지만,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며 삶에 적용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육체적 '백발'이 아니라, 삶의 깊은 이해와 통찰에서 비롯된 정신적 '백발'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영예의 상징이다.
숫자가 지배하는 시대, 우리가 놓치는 것들: 양적 가치 너머 질적 가치를 찾아서
우리는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이, 소득, 학점, 팔로워 수, '좋아요' 개수 등 수많은 지표들이 개인의 성공과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양적 지표들은 측정하기 쉽고 비교하기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종종 인간 존재의 더 깊고 본질적인 측면들을 간과하게 만든다.
'몇 살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와 같은 질문 역시 이러한 양적 가치 평가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지혜서의 가르침처럼, 삶의 진정한 가치는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질적인 측면에 있다. 사랑, 우정, 연대, 기쁨, 슬픔, 배움, 성장, 봉사, 창조 등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경험들은 결코 숫자로 측정될 수 없다. 이러한 질적인 가치들은 삶의 깊이를 더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우리를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시킨다.
숫자에 대한 집착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게 만들고, 불안과 경쟁심을 부추기며, 정작 중요한 내면의 목소리와 삶의 본질적인 즐거움을 놓치게 할 수 있다. 오래 사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삶 역시 마찬가지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는 숫자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의미를 발견했느냐는 질적인 문제이다. 숫자가 지배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 의식적으로 양적 가치를 넘어선 질적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삶의 행복과 만족은 통장 잔고나 주민등록상의 나이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질과 의미의 깊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길이가 아닌 깊이로 새기는 삶의 영예: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
결국 지혜서 4장 8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다시금 던진다.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넘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채워나갈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것이다.
삶의 영예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깊이에 의해 결정된다. 깊이 있는 삶이란 지혜를 추구하고, 타인과 진실한 관계를 맺으며, 자신만의 가치를 실현하고, 세상을 향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자 노력하는 삶이다.
이는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며 순간의 의미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에 무언가를 기여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물론 오래 사는 것은 그 자체로 감사한 일이다. 더 많은 시간을 통해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사랑하며 성장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목적 없이 흘려보내는 긴 시간보다, 비록 짧더라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깊은 교감을 나누며 보낸 시간이 훨씬 더 영예롭고 의미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매몰되기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집중해야 한다. 삶의 길이(length)가 아닌 깊이(depth)를 추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시간의 한계를 넘어선 진정한 삶의 영예를 스스로 새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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